사회과학 자료실 ●탕평책 레폿 I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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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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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자료실 ●탕평책 레폿
사회과학 자료실 ●탕평책
[사회과학] ●탕평책
탕평책
탕평책(蕩平策)은 조선 영조가 당파 싸움을 막기 위해 당파간의 세력 균형을 위해 추진한 정책이다. 이러한 정책은 후대인 정조 대에도 이어졌다.
“탕평”이란 말은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 중 5조인 황극설(皇極設)의 ‘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무편무당왕도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이라는 글에서 유래했다. 가장 첫 탕평의 언급은 숙종조의 언급인데, 최석정이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이후, 경종 때 빛을 보지 못하였다가 영조부터 본격적인 탕평이 들어섰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 인물들의 화해를 주선하는 등 노력하였으나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정조 대에 이르러 성과를 거둔다. 정조는 자신의 침실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편액을 걸기도 했다.
영조의 탕평책
숙종의 뒤를 이어 소론의 지지를 받아 즉위한 경종이 4년 만에 죽고, 숙종의 넷째 아들 영조가 52년간 집권하면서 조선 왕조는 중흥의 꽃을 피웠다. 이 시기는 청나라가 강희(康熙), 건륭(乾隆)의 융성기를 맞이하여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내치에 전념할 수 있었다.
영조는 집권 초기인 1728년(영조 4년)에 소론계 이인좌의 도전을 받았다. 이인좌는 소론남인 세력과 중소 상인, 노비를 규합하여 청주 등지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 1762년(영조 38년)에는 소론과 연결된 세자(사도세자)를 노론의 주장에 따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는 비극도 있었다. 그리하여 찬성하는 벽파(僻派)와 이를 동정하는 시파(時派)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숙종 시대에 비하면 정치적 참극은 적은 편이었다.
정치적 탕평책
영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종전과는 다른 방식을 채용하였다. 왕은 요순과 같은 고대 성왕(聖王)을 자처하면서 초월적인 군주상을 수립하고, 이에 근거하여 이른바 ‘탕평책’(蕩平策)을 썼다. 원래 탕평책은 붕당을 없애는 데 뜻이 있었지만 당장 실현이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래서 당파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어느 당파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여 왕권에 순종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이를 ‘완론탕평’(緩論蕩平) 이라고도 한다. 탕평 정책은 숙종 때의 ‘환국’ 형식의 왕권 강화 방식이 많은 부작용을 낳은 데 대한 반성으로, 초당적 정치운용으로 왕권을 세우자는 발상이었다.
영조는 다른 한편으로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배후 세력인 재야 산림의 이른바 ‘공론’(公論)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또한 조정 안에서 ‘공론’의 대변자임을 자처하던 이조낭관과 한림(翰林)들이 자신의 후임을 자천(自薦)하는 제도를 폐지하였다. 그 대신에 일반민의 여론을 직접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신문고 제도를 부활하고, 궁 밖에 자주 나가서 직접 민의를 청취하였다. 백성들이 행차 도중의 왕을 직접 만나서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것을 당시 상언(上言), 격쟁(擊錚)이라 하였다.
사상적 탕평책
영조는 사상 정책에서도 탕평을 지향하였다. 주희의 성리학을 일단 중심에 두면서도 왕권 강화를 지지하는 남인학자의 고학(古學)을 받아들이고, 《주례》나 《정관정요》와 같은 법가적 저서들도 경연에서 공부하여 개방적 자세를 보였다. 말하자면 당시 여러 붕당의 진보적 사상을 모두 포용하여 왕권 강화와 국가 중흥에 이용하였다.
한편,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먼저, 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1750년(영조 26년)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고, 당인들이 장악한 병권을 병조에 귀속시켰으며, 탁지정제(度支定制)에 따라 국가재정을 개혁하고, 《무원록》(無寃錄)을 편찬하여 형벌 제도를 완화하였으며,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三覆法)를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영조 때에는 두만강, 압록강 일대의 농지 개간과 방어 시설 확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강화도, 덕적도 등 도서 지방의 방어를 위한 해방정책(海防政策)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강화도에 외성을 쌓고(1744년), 평양에 중성(1733년)을 쌓는 등 축성 사업과 아울러 각종 국방 지도를 제작하였다.
한편, 수도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한양의 부유한 시민(공인)을 주축으로 수도 방어 체제를 개편하고, 1751년에 이를 《수성윤음》(守城綸音)으로 반포하였다. 이는 한양의 상공업 발달에 따라 국방 개념의 변화를 의미한다. 영조 36년(1760년)에는 한양의 청계천을 준설하여 도시를 재정비하고, 왕도(王都)와 상업 도시로 번영하여 한양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한양 지도를 많이 제작하였다.
국토의 심층적 파악과 국가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국적인 지리지와 지도의 편찬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16세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이 이미 변화된 지리 지식을 반영하지 못하여 이를 개편하려는 시도는 숙종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1765년에 영조는 이 작업을 적극 추진하여 방대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완성하였으며, 이어 지리전문가인 신경준(申景濬)으로 하여금 1770년에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여지고》(輿地考)를 편찬케 하였다.
지도는 지리지와 국토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영조는 1770년(영조 46년) 신경준을 시켜 《동국여지도》라는 8권의 채색 지도집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조선 전도(全圖)와 도지도(道地圖), 그리고 전국의 읍(邑)을 모두 그린 것으로, 모눈으로 선을 구획하여 지도의 정밀성을 높인 것이다. 이 밖에 당시 뛰어난 지도학자인 정상기(鄭尙驥), 정항령(鄭恒齡) 부자의 지도를 입수하여 홍문관에 모사해 놓기도 하는 등 한국 지도 발달사에 큰 업적을 쌓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규장각에 있는 아름다운 채색 지도집인 《해동지도》(海東地圖)(8권)도 175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지도집은 전국의 모든 읍과 진(鎭), 그리고 만리장성과 중국전도유구지도 등 370여 종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학문을 숭상하고 국가의 문물제도를 시의에 맞게 재정비하려는 의욕에 넘쳤던 영조는 이 밖에도 많은 편찬 사업을 이룩하여 문예 부흥의 터를 닦았다. 《속대전》(續大典), 《속오례의》(續五禮儀),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 《동국문헌비고》 등은 대표적 업적이다.
[문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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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종류 : HWP 파일
자료제목 : 사회과학 자료실 ●탕평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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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 사회과학,●탕평책,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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